중구의 지명 유래
2016-08-11 17:00:01 | artko2 | 조회 5705 | 덧글 0

□ 개관

 

중구는 대구의 중앙에 위치한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서기 1601(조선선조 34)경상감영(慶尙監營)이 포정동[현 경상감영공원]에 설치되어 행정산업군무를 통괄하는 관찰사가 상주하게 됨으로써 이곳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된 것이 오늘날의 대구로 발달하게 되었다.

 

지역의 중앙지대인 중구는 사실상 우리나라 3대 도시로 성장한 대구발생의 근원지라 할 수 있으며 시청 등 주요 기관이 밀집되어 정보와 금융유통의 중심지로서 도심관리기능이 강화되고 있는 대구의 심장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중구 행정구역 변천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53. 4. 1. 대구시 중부·종로출장소 설치  

1963. 1. 1. 법률 제 1174(1962. 11. 21 공포)로 구제(區制실시에 따라 중부(), 종로(鍾路)의 두 출장소(出張所)가 통합되어 대구시 중구로 승격됨(54)

1965. 1. 1. 행정동 통·폐합(13개 행정동 

1970. 7. 1. 시 조례(條例제 610(1971. 7. 1 공포)로 봉산 1구동(鳳山 1區洞)봉산 2구동(鳳山 2區洞)으로 분동(分洞)(13동→14개 행정동)

1975. 10. 1. 대통령령(大統領令제 7816(1975. 9. 23 공포)로 구계(區界)가 일부 변경됨에 따라

 ◦ 서구 내당동 일부남구 남산동대봉동 각 일부북구 칠성 2가동 일부를 편입

 ◦ 대신동 일부달성동 일부를 서구로

 ◦ 봉산동 일부덕산동 일부대신동 일부를 남구로

 ◦ 동인 1가 일부동인 3가 일부를 북구로 편입

시 조례 제 919(1975 10. 1 공포)로 봉산 1, 2구동을 봉산동으로 통합(統合)하고대신동(大新洞)을 대신 1대신 2동으로 분동함

1980. 4. 1. 대통령령 제 9630(1979. 9. 26 공포)로 남구 남산동 전역과 대봉동 일부 및 대명동 일부 편입(57)

1981. 5. 16. 시 조례 제 1346(1981. 5. 4 공포)로 중구 동인동(東仁洞) 2가 1번지에서 중구 동인동 2가 78번지로 구청소재지를 이전함

1981. 7. 1. 법률 제 3424(1981. 4. 13 공포), 대구직할시인천직할시 설치에 관한 법률에 의거 대구직할시 중구로 승격함

1988. 5. 1. 자치구로 승격  

1991. 4. 15. 지방자치제 실시 구의회 개원  

1993. 7. 15. 구조례 제 242(1993. 7. 15. 공포)로 동간 경계 조정

 ◦ 삼덕동1가 일부를 동성로2동성로3가에 각각 편입

 ◦ 북성로1가 일부를 태평로1가에 편입

 ◦ 서성로2가 일부를 서문로2가에 편입

 

 ◦ 대신동 일부를 시장북로동산동에 각각 편입

 ◦ 달성동 일부를 수창동태평로3인교동에 각각 편입

 ◦ 서문로2가 일부를 계산동1가에 편입

 ◦ 사일동 일부남일동 일부를 포정동에 각각 편입

 ◦ 서성로1가 일부를 서내동에 편입

 ◦ 인교동 일부를 달성동에 편입

구조례 제243(1993. 7. 15. 공표)로 행정동 경계 일부 조정

 ◦ 동성동 일부남성동 일부를 봉산동에 편입

 ◦ 북성동 일부를 동성동에 편입

 ◦ 남성동 일부를 서성동에 편입

 ◦ 동성동 일부북성동 일부를 남성동에 편입

 ◦ 서성동 일부남성동 일부를 북성동에 편입

 ◦ 서성동 입부를 대신1동에 편입

1995. 1. 1. 대구광역시 중구로 명칭변경  

1995. 4. 20. 대통령령 제 14629(1995. 4. 20. 공포)로 달성동 일부를 서구에 편입

1995. 7. 1. 민선 자치시대 개막  

1998. 4. 9. 구조례 제 417(1998. 4. 9. 공포)로 행정동 통폐합

 ◦ 삼덕 12가동과 삼덕 3가동 → 삼덕동(18개 행정동)

1998. 9. 14. 구조례 제432(1998. 9. 14. 공포)로 행정동 통폐합(19개→13개 행정동)

 ◦ 동인 12가동과 동인 4가동 → 동인124가동

 ◦ 봉산동과 동성동 → 성내 1

 ◦ 남성동과 북성동 → 성내 2

 ◦ 서성동과 달성동 → 성내 3

 ◦ 대신 1동과 대신 2동 → 대신동(13개 행정동)

1999. 6. 1. 동인 2가 177-4번지로 구청사 이전  

1999. 7. 13. 구조례 제459(1993. 7. 13. 공포)로 구청 소재지를 중구 동인동 2가 78번지에서 동인동 2가 177의 4번지로 이전

2007. 9. 1. 동사무소 명칭변경→동주민센터1)

 

 

1. 계산동(桂山洞)의 자연부락

 

□ 개관 조선말기 계산동(桂山洞)은 약전골목이 된 대구읍성의 남쪽 성곽 옆에 형성된 동네이다계산동의 ‘계산’은 계수나무가 있는 산을 의미하는데 현재 동산병원이 들어선 동산을 말하고 있다동산 바로 밑에 옛 대구 신천이 흘렀으며 그 신천 방둑을 따라 형성된 동네가 계산동이다.

원래는 대구부 서상면 지역이었으나 1911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동산동 일부와 함께 명치정(明治町) 1정목(丁目)이 되었다가 8·15광복 뒤인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을 없애면서 계산동 1가로  바뀌었다.

1981년 대구직할시 중구 계산동을 거쳐 1995년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이 되었다계산동은 법정동이고 행정동은 성내 2동이다계산1가와 계산2가로 이루어진다비석거리 · 짚전거리 등의 자연부락이 있으며계산오거리~남문시장~대봉파출소 구간의 명륜로가 지난다문화재로는 대구 계산성당[사적 290]이 전한다소설가 현진건(玄鎭健)이 이곳 출신이며 그의 문학비가 달서구 두류동 와룡공원에 있다문학비는 원래 구라동에 있었으나 도로공사로 1996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가로 54세로 24높이 120㎝이다언론기관인 매일신문사가 있다.2)

 

1-1. 계산(桂山) 1()의 자연부락

 

(1) 계산(桂山)

 

 

계산은 계산동에 있었던 산 이름이면서 계산동의 자연부락으로 불리었다계산(桂山)은 원래 산이면서 주위에 인가가 생겨 계산동(桂山洞)의 자연부락이 되었다현재의 계산 성당과 주변의 부락이다계산리(桂山里)에서 계산동(桂山洞)이 되었다계산(桂山)은 원래 신천이 한 가지로 흐르기 전에 강이 마을 앞으로 흘렀다그때의 계산(桂山)은 이 강의 강변으로 야산이었으며 안동에 있던 경상감영이 대구로 오기 전에는 현재의 경상감영 자리에 중국에서 귀화한 두사충이 살고 있었다경상감영이 대구로 옮기면서 이곳으로 온다는 국령(國令)을 듣고그는 경상감영으로 이 자리를 내어주고 두사충은 계산(桂山기슭으로 옮겼다.약전골목 건너 편현재 계산 성당 동편 근방 빈 땅인 약3000평과 교환한 그곳은 계산동169번지로서 두사충 장군의 생활 근거지가 되었다이곳에서 뽕나무를 많이 심어 뽕나무밭을 이루게 되면서 급기야는 뽕나무골목도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두사충은 대구 최정산 아래 경마장[현재 대명11동 산 306번지경북승마장협회]의 서쪽편 (현 아파트 지역)에 대명단(大明壇)을 설치하고 초하루 보름에는 비바람을 가리지 않고 관복을 입고 명국 황제에 대해 향배봉향(向拜奉享)하였으니일편단심 명나라를 생각하는 충신이자 현신(賢臣)으로서의 충절을 헤아릴 수 있다3) 당시에 대명단(大明壇)을 세우고 대명단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이 마을을 대명동이라 불러 이것이 지금은 대구 최대의 큰 마을이 되었다.

(제보자 수성구 만촌동 987-8, 최재원대구대 전 대학원장, 84세 수성구 범어2동 152-5, 정원용박약회 전 회장청주정씨 대동보 회장, 84세 수성구 지산동 우방맨션1031103성병희 안동대 명예교수민속학자,84북구 동변동 선수촌 아파트 102동 208이용식, 70광신한약방대표대구 약령시보존위원회 이사장채록일자 2008.9.6)

 

(2) 명치정(明治町) 1정목(丁目)

 

명치정(明治町) 1정목(丁目)은 계산1동의 부락명칭으로 계산1가의 일제강점기 때의  동명(洞名)이다. 1911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식의 동명으로 변경할 때에 계산동1가의 주위 부락을 명치정(明治町) 1정목(丁目)이라고 했다가 광복 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을 없애면서 1946년부터 계산(桂山기슭에 사는 마을이라고 계산동(桂山洞으로 하고 1정목(丁目)을 1()로 변경하여 계산동(桂山洞) 1()로 고쳤다 

(제보자 상동)

 

 

(3) 비석거리

 

비석거리는 계산동의 거리이면서 자연부락명칭이다현재 매일신문사가 있는 이곳의 맞은편에 석물공장이 많이 있어서 대구 지역사람들이 비석을 세우려면 이곳을 찾곤 했다뿐만 아니라 새겨놓은 비석이 길가에 세워져 있어서 길거리에 비석들을 조각하여 세워둔 것이 즐비하여  이 부락을 비석거리라 불려지게 된 것이다 

(제보자 상동)

 

1-2.계산(桂山) 2가의 자연부락

 

(1) 계산성당

 

계산성당은 계산동에 있는 성당이면서 계산동의 자연부락명칭으로도 일컬어졌다. 19세기 초부터 대구에 천주교의 토착이 이루어지고신나무골에 성당이 있어 1888년 고종 25년에 새방골[현재 서구 사리동]로 옮겼다그 후 1891년 포교에 힘쓰던 바오로 신부가 은신생활을 벗어나 대구로 옮겨오면서 1897년에 현재의 계산동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1899년 한식목조십자형 건물이 신축되었으나 곧 소실되었다.

1902년 벽돌로 고딕양식의 성당을 준공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영남지방의 최초의 고딕식 성당이다이 성당 주위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부락이 이루어지자 이 주위 부락을 계산 성당이라고도 부른다.

(제보자 상동)

 

(2) 명치정(明治町) 2정목(丁目)

 

명치정(明治町) 2정목(丁目)은 계산동의 일제 때 동명이다명치정(明治町) 2정목(丁目)은 일제강점기 때에 계산동 2가를 일컫는 일본식 동명으로 명치정(明治町) 2정목(丁目)으로 변경하였다. 8·15광복 뒤인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명치정(明治町)을 없애면서 계산동 1가로 바뀌었다

 

(제보자 상동)

 

(3) 뽕나무골목 · 뽕나무꼴

 

뽕나무 골목은 계산동의 자연부락명이다뽕나무골목은 뽕나무골뽕나무꼴이라고도 했다계산동 뽕나무골의 가운데로 난긴 골목을 뜻하며 동시에 그 주위의 부락을 뽕나무골목이라 불렀다두사충의 원래 집터는 나중에 경상감영으로 쓰였는데 대구 읍성의 정확한 한가운데였다두사충은 정유재란 때 이여송과 함께 조선을 도우려 왔다가 명나라가 망하고 청이 번창하자 청나라의 백성은 될 수 없다면서 평소 뜻대로 그의 두 아들 [두 산두일건]과 함께 조선에 귀화하여 현재 경상감영의 자리에 살다가 경상감영이 안동에서 대구로 오면서 이 자리로 옮기게 되자 이곳을 내어주고 계산동으로 옮겼다그래서 계산동 일대3,000여 평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 농사로 생계를 유지했다이것이 뽕나무골목이다현재 고려예식장과 계산 성당 주차장에서 오른 쪽 골목지점이다지금은 굽었지만 당시는 염매시장까지 곧은 골목이었다그래서 이를 뽕나무꼴뽕나무골뽕나무골목이라 불렀다.

(제보자 상동)

 

(4) 짚전거리

 

짚전거리는 계산동의 자연부락명이다짚전거리는 현 종로에서 약전골목으로 남쪽은 계산동이고 북쪽은 남성로 부근으로 약령시장으로 들어오는 입구에서 종로 쪽 양편에 짚신이나 가마니를 짜는 자료로 쓰기 위해 짚을 쌓아놓고 짚을 파는 전방[가게]이 즐비하였다.그러니 조선말까지 짚단을 쌓아두고 짚 장사를 하는 전방이 많이 있다고 하여 짚전거리라 부르고 그 주위의 마을을 대신하는 자연부락 명칭으로도 불리었다지금은 그 흔적도 없고 짚을 파는 장사를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제보자 북구 동변동 선수촌 아파트 102동 208이용식, 70광신한약방 대표대구 약령시보존위원회 이사장남구 봉덕2동 효성타운 208동 907최창구, 70성보철물사장/중구 청구맨션 A동 1108편성식, 69인교직물 대표채록일자  2008.6.6. )

 

※ 참고. <계산동의 지명유래와 두사충이 살다간 흔적>

 

 

두사충은 중국 두릉(杜陵)태생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제독인 이여송과 함께 조선을 도우기 위해 나온 사람이다그는 수륙지획주사4) 라는 벼슬로 지세를 살피어 진을 펴기에 적당한 장소를 찾는 일이 그의 임무였다그는 이여송의 일급참모로써 군진을 펴는데 도왔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펼 때 조선군과의 긴밀한 상담을 했다이런 인연으로 우리나라의 수군을 통제하던 이순신 장군과도 매우 절친한 관계였다임진왜란 때에 명나라 이여송 장군과 함께 조선에 와서 그가 진지를 구출할 때마다 두사충은 그를 도와서 공을 세운 이여송 장군의 일급 참모였다뿐만 아니라 함께 조선의 원군으로 참여한 진린(陳璘)도독은 그의 매부였다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그의 매부인 진린(陳璘)도독과 우리나라에 다시 왔다정유재란이 끝나자 두사충은 압록강까지 매부 진린을 배웅하고 조선에 귀화했다.그러자 조선에서는 두사충에게 대구시내 현 경삼감영공원 자리를 그에게 하사하여 편히 살도록 편의를 도모해 줬다그 뒤에 두사충이 하사받은 땅에 경상감영이 안동에서 옮겨 온다고 하자 그 땅을 내어주고는 계산동 169번지에 집을 짓고 뽕나무를 심으며 살아가게 되었다이때부터 계산동 일대는 두시(杜氏)들의 세거지가 되었다그는 주위에 많은 뽕나무를 심었고 그래서 그 일대를 뽕나무골목이라 불렀다그는 명나라가 망하자 고향에 두고 온 조국과 처자를 위해 최정산 밑에 고국인 명나라를 기리는 제단을 세워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으로 갈아입고 명나라를 향해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그리고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이라 붙였다고 한다그는 살아생전 묻힐 곳도 미리 잡아두었다지금 2군사령부가 들어서 있는 곳에 묘 터를 아들에게 일러주고 담티고개로 되돌아 왔으나 그는 담이 심하여 이 고개에서 숨을 거두었다그래서 이 고개를 담티고개라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가 죽은 후 자손들은 두사충이 잡아둔 명당까지는 가지 못하고 묘소를 형제봉 기슭에 쓰게 되었고두사충이 잡아둔 묘 터에는 고산서원이 들어섰다.두사충의 묘 터에는 그 후에 국정원과 2군사령부가 들어온 군사적 요충지가 되고 두상충의 무덤은 고모령의 전설이 서려 있는 국정원 뒤 편 형제봉 기슭으로 잡혔다이 봉우리는 비슬산에서 범물동 용지봉을 거쳐 내려온 산맥이다. 1912년 그의 후손들이 힘을 합해 묘지 옆에 모명제(慕明齋)라는 재실을 지어 그를 기리고 있다.

 

두사충의 세거지는 현 경상감영 공원 터에서 계산동으로여기에서 다시 최정산 기슭으로 옮겼다이러한 사적은 그의 두릉두씨세보(杜陵杜氏世譜)에 자신이 쓴 두사충의 자서(自序)5) 에서 잘 나타나고 있으니 그의 자서(自序)를 살펴보자.

 

나의 선조께서 두릉(杜陵)에 사셨으므로 본관을 두릉(杜陵)으로 하는 것은 모두 아는 바이다 ---(전략)---임진년에 일본이 조선에 침입하여 기세를 부림에 황제께서 원군을 보내어 정벌할 때 진린(陳璘)에게 수군도독을 삼으니진린은 나의 매부라위무기(魏無忌)와 조승(調勝)6) 처럼 사생(死生)을 같이 함은 의()의 당연한 바요진터를 잡는 것은 전쟁에 임해 무인이 함께 해야 할 일이다함께 노량싸움에 출전한산도에 주둔하여 이원수7) 와 서로 만나 시를 지으니,

 

  북녘 땅에선 달고 씀을 함께 하고                (北去同甘苦)

  동국에 와서는 사생을 같이 하기로 맹세 했네   (東去共死生)

  성 남쪽 어느 날 밤 달빛아래 함께 놀려나      (城南他夜月)

  오늘은 이 한잔 술로 정을 나누네              (今日一盃情)

 

라고 하면서초면임에도 연릉계자(延陵季子)가 자산(子産)을 만난 듯8) 하였다두 번이나 조선국에 와서 창을 베개 삼아 들판에 뒹굴며 간난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정공(正攻)에 실패하지 않고 중흥의 과업도 다행히 완수하였다그러나 초당선생(草堂先生)9) 의 북벌 때처럼 발병난 다리를 끌고 압록강까지 와서 울며 진군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황제께 복명해야 하니 부득이 가야 하겠지만 나는 생각한 바 있으나 말할 수 없네.10) 한 잔의 압록강 물을 뿌려 천 줄기 눈물로 삼아 고향 가까운 위수가[渭之瀕水]에 흘려 보내려 하나 물도 목이 메어 흐르지 않노라옛 시에 말하기를,

 

  하늘 끝에 서있는 노인 돌아갈 수 없으니     (天邊人歸)

 

  해 저문 날 동녘 땅 강가에서 슬피 우노라    (日暮東大江哭)

 

라고 하였으니 이는 나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차라리 남아서 멀지 않아 조선[小中華]사람이 될지언정 오랑캐는 될 수 없다하고 달구현[達句縣,達城,大丘]의 최정산(最頂山밑의 야인들 사이에 섞여 살며 모명(慕明)이라 호하고 동네 이름도 대명이라 하였다마을 동구 밖에 단을 모아 초하루 보름마다 관복으로 갈아입고 북녘을 향해 절하고 눈물 흘리며 수구(首丘)11) 의 회포를 달랠 뿐이라 --- (중략) ---

 

최정산 높고 물고요한데 내 거기서 채미가(採薇歌)12) 한 곡을 부르노라.

 

  동해바다 한반도를 내 밟고자 하나         (有島東溟吾欲蹈)

  중천에 달빛은 어느 것이 더 밝단 말가   (中天月色爲誰多)

 

이 시를 지어 후세 사람들이 크게 비웃을지 모르겠으나 더러 이 시를 지어 슬퍼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13)  

 

 

라고 하였다윗글은 두사충이 쓴 자서(自序)의 일부분이다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그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두 차례에 걸쳐 이여송과 함께 조선 군사를 도우려 왔다가 조선에 귀화한 사실이다그리고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설 것을 미리 알고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그의 불굴의 충성심은 눈물을 머금고 조선에 귀화하게 된 명나라의 충신이며 북쪽 오랑캐 청나라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는 명의 충직한 지사였음을 알 수 있다군사가 진을 치려면 산세와 지리에 밝아야 한다그는 천리를 내다볼 줄 아는 혜안을 가진 사람이다.전쟁터에 같이 온 매부 진린장군과 마지막 이별장면을 다시 보자“그대는 황제께 복명해야 할 터이니 부득이 가야 하겠지만 나는 생각한 바 있으나 말할 수 없으니 한 잔의 압록강 물을 뿌려 천 줄기 눈물로 삼아 고향 가까운 위수가에 흘려보내려 하나 물도 목이 메어 흐르지 않는구나.”라고 탄식하면서도 고국 명나라로 돌아가 장차 오랑캐 나라 청의 신하가 될 바에는 조선에 귀화하고자 했던 것이다이는 매부와의 마지막 이별장면에서 그의 솔직한 심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조선에 귀화한 이유를 그의 자서에서 “차라리 남아서 조선 사람이 될지언정 멀지 않아 오랑캐는 될 수는 없다”고 하였다특히 그는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를 “나는 생각한 바 있으나 말할 수 없으니14) ’에서 명이 망하고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하게 될 것을 미리 알고 한 말이다그렇지만 이는 자기만이 아는 비밀이어서 발설할 수도 없는 그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다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 설 것을 미리 알고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그의 굳은 의지는 참으로 명나라의 훌륭한 신하였다충신은 불사이군이라더니 이 두사충을 두고 한 말 같다.

그는 대구 한가운데인 경상감영 옛 터에 자리 잡고 살았는데 이때 안동에서 이곳으로 경상감영을 옮기려 하자이 자리를 비켜주고 현재 계산동으로 옮겨 살았다그의 예언대로 명나라가 망하고 오랑캐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하자 그는 “달구현 최정산 아래로 옮겨 모명이라 호하고 마을을 대명이라 하며 동구 밖에 단()을 세웠다그리고  초하루 보름마다 관복으로 갈아입고 북녘을 향해 절하며 눈물로 수구의 초심을 달랬다”고 한다 

지금까지 그가 대명단(大明壇)을 세었다는 위치가 최정산 아래로만 알려져 있어 어디인지 짐작만 무성했다마침 그의 14대 종손인 두남택(杜南澤)이 최정산 아래 경마장 서쪽15)편임

을 <모명선생내한사기발(慕明先生來韓史記跋}>16) 에 기록되어 있음을 보고 좀 더 구체적인 위치가 알려지게 되었다.

 

따라서 현재 대구 남구 대명11동 산 306 번지에 있는 구 경마장의 서쪽 편 마을 동구17)에 대명단을 세우고 그 마을을 대명동이라 한 데서 대명동의 지명 유래로 짐작된다현재 구 경마장의 서편과 앞산 순환도로가 1m 간격 정도로 인접해 있고 순환도로 바로 서쪽 편 건너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구 경마장 공사를 시작할 때는 이곳은 험난한 악산(惡山)이었고 지금은 구 경마장 바로 서남쪽에는 매자골이란 골짜기가 있어서 당시는 최정산에서 흐르는 물소리는 선경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구 경마장 공사를 할 때에 현 앞산순환도로를 건너 서쪽 편은 동그란 야산이 있었고 제단이 있을 만한 곳으로 동그란 언덕이었다고 증언한 경북승마협회 이현배 전무이사의 말에 의하면 이곳이 대명단이 있었던 곳이라 생각된다그 아래는 몇 채의 집이 드물게 있었던 점으로 보면 그곳이 바로 초창기 대명동의 출발지점으로 짐작된다여기서 출발한 대명동이 지금은 대구에서 가장 넓은 11개동으로 발전하였고 대명이란 동명도 두사충이 살던 이 마을을 대명동이라 한 데서 나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제보자 수성구 지산동 1257-1 영남맨션 103동 403김광순경북대명예교수문학박사국문학 전공 70채록일자 2008.5.4/ 수성구 범어2동 152-5, 정원용박약회  전회장,청주정씨 대종회 회장, 84북구 동변동 선수촌 아파트 102동 208이용식, 70광신한약방 대표약령시보존위원회 이사장채록일자  2008.6.6.)

 

 

2. 공평동(公平洞)의 자연부락

 

□ 개관 공평동(公平洞)의 지명유래는 이 마을에 원래 대구지방법원이 있어 지방법원에서 모든 일을 법의 근본 정신대로 공평하게 처리한다18) 는 뜻으로 공평동(公平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원래는 대구부 동상면 지역이었으나 1911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남성면과 신전리 일부가 합쳐져 남룡강정(南龍岡町)이 되었다. 8·15광복 뒤인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남룡강정(南龍岡町)을 없애면서 공평동으로 바뀌었고 1981년 대구직할시 중구 공평동을 거쳐 1995년 대구광역시 중구 공평동이 되었다공평동은 법정동이고 행정동은 성내 1동이다서쪽에는 달구로가 남북 방향으로 지난다공공기관으로는 성내 1동 사무소가 있고, 2.28중앙청소년공원공평주차장 등이 있다.19)

 

 

(1) 남룡강정(岡町)

 

남룡강정(岡町)은 일제 때 강제로 붙여진 공평동의 일본식 동명이다이전 대구부 동상면지역이었으나 1911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남성면과 신전리 일부가 합쳐져 남룡강정(南龍岡町)이 되었다그래서 1945년 해방 이후 다시 공평동이 되기 전까지 부르던 일본식 마을 이름이다일제 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이 주로 살았던 부락이다.

(제보자 수성구 지산동 우방맨션 103동 1103성병희, 84안동대 명예교수채록일자 2008.7.16/수성구 범어2동 152-5, 정원용박약회 전 회장청주정씨 대종회 회장, 84. / 북구 동변동 선수촌 아파트 102동 208이용식, 70광신한약방 대표약령시보존위원회 이사장 채록일자 2008.7.16.)

 

(2) 2.28 기념 중앙공원

 

2.28 기념 중앙공원은 공원이면서 그 주위의 부락명칭으로 불리어 지기도 한다이 공원은 공평동 16번지로 옛날 중앙초등학교 자리이다중앙초등학교가 없어지면서 생긴 대구의 녹지 공간 확보를 위해 중앙지에 위치한 공원이다그 과정을 보면시민단체들이 1995년부터 <중앙초등학교의 공원화 및 공유지 녹색 공간화 시민협의회>를 구성대구시 및 대구시의회대구시교육청에 탄원을 가한 결과 1999년 부지를 팔려는 당국을 설득하는데 성공마침내 시민들을 위한 도심근린공원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이후에도 이 공원의 명칭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일었는데, 2.28 대구 민주운동기념 사업회와 중앙초등학교 총동창회 사이의 명칭에 대한 논란은 양쪽의 뜻을 담아 결국 2.28기념중앙공원 이라는 이름으로 일단락되었다. 2.28은 2.28학생민주의거를 의미한다이승만의 부패한 자유당 정권에 대항해 대구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4.19대학생 시위와 이승만의 하야로 이어져 그 의미가 매우 깊은 학생민주의거운동이다이 거룩한 정신을 이어 받고 후손들에게 영원히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중앙초등학교가 다른 곳으로 옮길 즈음에 이곳에 공원을 만든 것이 2.28기념 중앙공원이다 

(제보자 상동)

 

 

 

3. 교동(校洞)의 자연부락

 

□ 개관 원래 향교의 위치는 부동2(府東二里) [현 교동 26번지]에 있었다.20) 이곳은 대구부 동상면 지역으로 1911년 일제 강점기 시에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용덕리 일대를 병합하여 동본정(東本町)이라 하였다가 1947년 왜식동명 변경에 따라 향교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교동이라 하였다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 있는 대구향교는 원래 1398(태조7)현유(賢儒)의 패를 봉안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교동에 창건되었다당시에는 대성전과 명륜당이 있었으며, 1400년에 불에 타자 곧 재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어 1599(선조 32) 현재의 달성공원 부근에 재건하였다. 1605년 교동으로 이전하여 명륜당을 중건하였으며, 1932년 현 남산동735번지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재(東齋)·서재(西齋)·문묘·삼문 등이 있으며향교 내에는 대구성의 축성 및 유래를 기록한 축성비(築城碑)와 수성비(修城碑), 경상도관찰사·판관·군수 등을 지냈던 사람들의 불망비(不忘碑)·송덕비 등이 있다21) .

 

(1) 동본정(東本町․ 교동

 

동본정(東本町)은 일제 때 붙여진 교동의 일본식 부락명이다따라서 동본정(東本町)은 일제강점기에 교동을 동본정이라 변경하여 부른 일본식 동명이다대구부 동상면의 지역으로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용덕리 일대를 병합하여 동본정(東本町)이라고 하다가 광복 후인 1946년 항교골의 이름을 따서 향교가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교동이라 불리어졌다

 

(제보자  수성구 만촌동 987-8, 최재원대구대 전대학원장, 84세 수성구 지산동 우방맨션 103동 1103성병희, 84안동대 명예교수채록일자 2008.7.16/대구광역시,홈페이지 참조)

 

(2) 양키시장

 

양키시장은 교동시장의 다른 이름으로 그 주위의 부락을 양키시장이라 지칭하기도 한다대구 중구 교동 70-26에 위치한 시장으로 대구역에서 남쪽으로 큰 길 건너편 일대에 있으며 일명 양키시장이라고도 한다전자상가골목으로 주요제품으로는 컴퓨터를 비롯하여 전자제품이 중심이고 양주화장품 등이 주류를 이룬다교동시장은 6.25사변이라는 어렵던 시대에 생겨났다. 6.25동란으로 미군이 대구에 주둔하면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인근 미군부대 PX에서 흘러나온 많은 생활 물자들이 판매되었다이 시장에 미군의 군수물자를 비롯하여 미국인들의 물품을 많이 거래한 데서 시장이름이 양키시장으로 불리어지게 되었으며 교동의 자연부락으로도 알려져 왔다 

(제보자 상동)

 

(3) 향교동

 

향교동은 교동을 지칭한 것으로 향교가 있는 동네를 말한다그래서 향교동은 교동의 자연부락이 되었다원래 향교가 있던 자리라 하여 이렇게 불려졌다향교동 또는 향교골이라 하였다원래 대구부 동상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용덕리 일대를 병합하여 교동을 일본식 동명인 ‘동본정(東本町)’이라고 고쳐 부르다가 1946년 옛날에 있었던 향교의 이름을 따서 ‘향교동’ 혹은 ‘향교골’이라 불려졌다현재 향교는 중구 남산동에 있다.향교동은 향교가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오래 동안 교동의 자연부락으로 불리어져 왔다대구향교는 1398(태조 7)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현 교동(校洞)에 대구서는 처음으로 창건되었다당시에는 대성전과 명륜당이 있었으며, 1400년에 불타자 곧 재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어 1599(선조 32) 현재의 달성공원 부근에 재건하였다. 1605년 교동으로 이건하여 명륜당을 중건하였으며, 1932년 남산동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이전 된 후부터는 향교동이란 이름을 잘 쓰지 않는다.

(제보자 상동)

 

 

※ 참고. <대구 향교>

 

대구 향교는 현재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735-4에 위치하고 있다대구 향교는 향교지와 대구부 읍지에서 살펴 볼 수 있다먼저 향교지에서는 대구향교의 연혁에 대하여 태조

7(1398) 대성전과 명륜당을 창건하였으나 정종 2(1400)에 소실되었다이후 선조 34(1601)에 대성전을선조 39(1606)에 명륜당을 중건하였고 1932년에 현재의 남산동으로 옮겨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그리고 대구부읍지에서는 대구 향교의 연혁에 대해 "향교는 부의 동쪽 2리에 있다처음에는 동문 밖 고성에 있었으며 지금까지 그곳이 ‘옛 향교 터’라고 한다.”라고 하였다이후 선조 32(1599)에 달성으로 옮겼다가 선조 38(1605)에 달성으로부터 지금 있는 곳으로 개축하였다명륜당과 동․서제는 모두 성균관 제도대로 했다.

이상의 기록과 전하는 바에 의하면대구 향교는 태조 7(1398) 부동 2(지금의 동성로 교동으로 추정)에 건립되었으나선조 25(1592) 임진왜란의 병화에 소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그 후 선조 32(1599)에 달성공원 남각에 건립하였으나관찰사의 장계를 올려 윤허를 받아 옛터인 교동에 다시 옮겼지만 명륜당은 역부족으로 건립하지 못하였다인조2(1624) 대구 사림이 명륜당 건립 안을 건의하여 즉시 착공하게 되었으며이듬해에 준공하였다교동의 향교가 현재의 남산동으로 이전한 것은 일제강점기의 일이다당시 일제는 복잡한 대구시가지를 정리한다는 핑계로 향교 이전을 강행했지만실제로는 향교를 중심으로 지방유생들의 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향교 경내는 토담을 길게 가로놓아 앞·뒤뜰을 엄격히 구분해 놓았다앞뜰에는 명륜당낙육재 등 비교적 근래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으며외삼문을 열고 뒤채로 들어서면 조선시대의 건물인 대성전이 나타난다대성전은 1601(선조 34)에 지어진 건물로 내부에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정면 3측면 3칸의 견실한 건물로지붕과 처마의 이음매 부분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대성전 앞뜰에는 옛 경상도 관찰사의 공덕을 기리는 기념비가 즐비하게 서 있어 진풍경을 이루고 있다대성전은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향교는 한문교육·예절교육 등 다양한 교육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전통 혼례장으로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또 정원이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어 조용히 사색에 잠기기에도 좋다.

(제보자 상동)

 

 

 

 

4. 남산동(南山洞)의 자연부락

 

□ 개관 남산동의 지명 유래는 남산 밑에 있다고 혹은 남문 밖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남산동이라 하였다남산동의 기원이 되는 남산은 경상감영을 중심으로 볼 때 남문(영남제일관밖 남쪽에 위치한다해발 162.4m의 아미산 남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이 산 정상에는 동화사의 포교당인 보현사가 있고 주위에 초가집무당 보살이 많이 살아서 무당촌이라고도 불리어지던 곳이다기생출신이 돈을 모아 교육기관에 투자하여 세운 옛 복명초등학교(현 교육청)의 건물이 있고풍수지리적으로 대구지맥이 아미산에 멈춘다고 하면서 여기서 북으로 1,000걸음 걸어 경상감영 자리에 집터를 잡은 중국 명나라 풍수지리가이며 장수였던 두사충의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원래 대구부 서상면이었는데1911년 남산정(南山町)이라고 하였다가 1946년 남산동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1949년 대구시에 편입되었다. 1951년 남부출장소가 설치되고, 1963년 남부출장소가 남구로 승격되면서 대구시 남구에 편입되었다. 1975년 남구 남산동 일부를 중구로 편입하고, 1980년 남산14동 전역을 중구로 편입하여 구간 경계를 일부 조정하였다. 1981년 대구시가 대구직할시로 승격되고, 1995년 대구직할시가 대구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대구광역시 중구에 편입되었다. 8·15 광복 이전에는 달성 서씨들이 소유한 논밭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시립 화장장과 그 주변에 공동묘지가 있었다그 이후 남산 4동 동사무소 동편에 원각사라는 절이 건립되었고원각사 주변에는 토기와 기와굴이 6군데나 설치되어 있어서 대구시의 목조와가 건축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고 한다또 한때는 유기(鍮器가내공업도 이곳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다고 한다그러나 오늘날은 대구 천주교의 발상지로 가톨릭대학교를 비롯하여 교구청수녀원성모당 등이 거대한 가톨릭타운을 이루고 있다. 1.4 후퇴 시 이북 피난민 250세대가 이곳에 머물렀는데 지붕은 천막으로 덮고 둘레 벽은 나무를 세웠으며 시에서 받은 가마니 500장으로 비바람을 막고 구호양곡을 받아 겨우 생활을 유지하다가 불행하게도 화재를 당하여 현 영남중고등학교 교실에 집단 수용되기도 했다그 후 다시 이 자리에 판잣집을 지어 판자촌을 이루어 거주하다가 스스로 살 곳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고 한다.22) .

 

 

(1) 남문시장

 

남문시장은 시장이면서 그 주변 마을을 지칭하는 부락명칭이 되었다일제 때부터 대신동에 소재한 서문시장은 큰장남산동에 소재한 남문시장은 새로운 장이란 뜻으로 새장이라 불리었고남성동에 소재한 덕산시장은 염매시장으로 불리다가 한국 전쟁 전달성 가창 사람들이 주로 비단건어물 등을 취급하여 지금의 남문시장인 새장에 모여 장사를 하면서 새로 생긴 시장이라고 새장이라 하다가남산동에 위치하며 남문 밖이자 아미산 남쪽에 있는 시장이라고 하여 ‘새장’을 ‘남문시장’으로 개칭하여 불렀던 것이다.

(제보자 : t수성구 범어2동 152-5, 정원용박약회 전 회장청주정씨 대종회 회장, 84/ 북구 동변동 선수촌 아파트 102동 208이용식, 70광신한약방 대표약령시보존위원회 이사장채록일자 2008.6.6.)

 

(2) 남산정(南山町)

 

남산정(南山町)은 남산동의 일제 때 동명이다따라서 남산정은 1911년인 일제 강점기에 남산동을 일본식 동명으로 변경한 일본식 명칭이다그래서 남산 밑에 있다고 혹은 남문 밖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남산동이 1911년에 남산정(南山町)이 되었고광복 후인 1946년에 남산동으로 고쳤으며 고쳐진 이후에도 오래 동안 남산정(南山町)이라 부르기도 했다.

(제보자 상동)

 

(3) 카톨릭타운

 

카톨릭타운은 남산3동으로서 카톨릭 기관이 많아 붙여진 남산동의 자연부락이다이곳에는 성 유스티노신학교수녀원성당수녀원수련원살트르성바오로수여원코미넽관 등의 건물 등이 있어 풍경과 경치가 좋다가장 좋은 곳은 김대건신부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곳이다남산 카돌릭성지 에서 두 번째 좋은 곳은 성모당 앞 광장이다그래서 카톨릭타운은 남산3동의 명성지로 남산동의 자연부락으로도 통용한다.

 

(제보자 상동)

 

(4) 무당골 · 무당촌

 

무당골은 보현사 주변지역에 무당이 많이 살아서 현재 보현사 주변의 남산동을 지칭하는 자연부락이다‘무당골’을 ‘무당촌’이라고도 하였다옛 복현초등학교 부근에서 보현사 주위의 아미산 언덕을 지칭하는 부락이다아미산 부근에 동화사의 포교당인 보현사가 들어서자 주위에 보살과 무당이 많이 살아서 ‘무당골’ 혹은 ‘무당촌’이라고 불러왔다.

(제보자 상동)

 

(5) 반월당(半月堂)

 

반월당이란 가게 이름에서 유래한 지명으로그 주위의 부락을 일컫는 자연부락명이다.특별한 건물의 이름이 지명으로 바뀐 예이다반월당이란 중구 덕산동 일대를 지칭하는 지명이다지금부터 약 70년 전까지만 해도 수양버들과 아카시아가 우거진 야산으로 사람들의 통행도 드문 한적한 곳이었다그러던 이곳에 건평 61평의 2층 목조 건물을 짓고 반월당이란 이름으로 백화점 영업을 시작하게 되자 차츰 집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붐비게 되었다이 반월당은 현 중구 남산 2동 927번지에 있었으며 차병곤씨가 지은 것으로 차씨는 현 약전 골목에서 상업으로 돈을 많이 모은 분이라고 한다이 백화점은 한국인에 의해 세워진데다가 주인이 대구 토박이기 때문에 일제 치하에서 더욱 유명해졌는지 모른다.취급된 상품은 여학생들의 수예품이 주종이고 고객도 당시 여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반월당의 경영은 차씨의 부인 최소돌씨가 맡았으나 큰 재미는 보지 못하고 1943년 경영난으로 딴 사람에게 넘겨져서 공신백화점으로 상호도 바뀌어 버렸다. 8.15.해방 이후 공신백화점도 문을 닫고 구시대의 흔적만 남은 채 헐리기 전까지 업종이 여러 번 바뀌었다고 한다.

(제보자 상동)

 

(6) 아미산(阿彌山)

 

 

아미산(阿彌山)은 남산동의 자그마한 야산 이름이면서 남산동의 자연부락이다그래서 아미산은 산 이름이면서 남산동의 자연부락 명칭으로도 쓰인다복명초등학교(현 교육청)에서 대한극장이 있는 곳까지의 언덕 전체를 말한다절강성 보타산(普陀山)에는 관세음보살사천성 아미산에는 보현보살안휘성 구화산에는 지장보살이 있었다보현사를 짓고 난 뒤 보현보살의 아미산을 생각하여 아미산이라 했다일설에는 어느 노승이 반월당의 조그만 언덕에서 아이들과 노는 모습을 보고 지었다고도 한다.

1866년 11월 18일 병인박해 때신자 30명과 이윤일 성인이 아미산 관덕정에서 형을 받았다고 하는데 현재는 시가지가 형성되어 옛 자취를 찾기 어렵다.

(제보자;수성구 지산동 영남맨션 107동 502서수생경북대명예교수문학박사, 88/수성구 지산동 우방맨션 103동 1103성병희, 84안동대 명예교수채록일자2008.7.16/ 북구 동변동 선수촌 아파트 102동 208이용식, 70광신한약방 대표대구 약령시보존위원회 이사장남구 봉덕2동 효성타운 208동 907최창구, 70성보철물사장채록일자  2008.6.6.)

 

(7) 절터

 

절터는 절이 있었던 터로서 남산동의 자연부락이다지금부터 60여 년 전에 경북 공고 뒤편인 남산3동 2380-31번지 일대에 윤목당(尹木堂) [일설에는 윤목탁이라고도 불렀다 함]이란 분의 아버지가 절을 지어놓고몇 년 후 돌아가시자 윤씨의 어머니가 이 절을 관리하면서 많은 불자들이 모여들었다 한다그 후 몇 년 뒤에 윤씨의 어머니도 돌아가시자 일본에서 불교관계 학교를 마친 후음악대학까지 나온 그의 아들 윤목당이 일본에서 돌아왔으나 천성이 호방한 인물로 절을 제대로 관리 못하여 쇠퇴하였다 한다이 절이 있었던 당시의 야산은 아름다운 수목으로 덮여 있었지만 나무는 없어지고 이 주위에 부락이 생겨 이 부락을 절터라는 지명으로 통용되고 있다.

(제보자 상동)

 

(8) 청국샘

 

 

청국샘은 샘이면서 그 주변 부락의 남산동을 일컫는 자연부락이다지금의 성모당과 구 대건중학교를 건축할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벽돌을 쌓는 기술자가 없어서 청국[중국]의 기술자를 고용하여 건축공사를 하였다당시 청국인 기술자인 모()서방이란 사람은 지금의2210-20번지 이병택씨의 집에서 살았으며 당시 감나무 밭이었던 곳에 모서방이 샘을 팠다고 한다당시에는 식수가 귀해 그 일대 사람들은 물을 길러 계산성당까지 가곤 하였으나 모서방이 샘을 어찌나 깊게 팠던지 어떠한 가뭄이 들어도 샘이 마르지 않아 그 주변 사람들은 계산성당까지 물 길러 가지 않고 청국샘 물을 먹었다 한다최근까지도 샘을 완전히 메우지 않고 숨구멍이라 하여 쇠파이프를 묻어놓고 샘을 청석으로 메워놓았다그리고 얼마 후면 그 자리도 주거환경개선지구로 지정되어 도로로 편입될 운명이다.

(제보자 상동)

 

(9) 화장터마을

 

화장터마을은 화장터가 있는 남산동의 자연부락이다대구 최초의 화장터이면서 그 주위의 마을을 지칭하는 남산동의 자연부락 명칭이 되었다화장터는 일제 강점기 시대인1925년에 남산 4동 2501-3번지[당시 남구 대명동 2501번지]에 세워졌으며, 1966년 5월에 현 수성구 고모동으로 이전하였다당시의 화장터는 붉은 기와지붕과 목재로 된 적산가옥인 본채와 여러 채의 사택이 있었는데 모두가 일본식 목재가옥이었다화장터 마당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극심한 가뭄에도 이 우물물은 마른 적이 없었으며비가 오거나 궂은 날은 괴상한 울음소리가 들려 관리인이 복도를 연결하는 쇠파이프를 두들겨 그 소리를 쫓았다고 한다지금 이 자리에는 쓰레기 하치장이 있으며 서편에는 유아원과 동사무소가 자리 잡고 있다. 1929년에 작성된 대구지도중 남산동 일대의 모습을 보면좌측 상단에 현재의 새길시장 삼거리가 보인다남쪽으로 뻗은 곧은 길 옆에 소공원이 당시 화장장(화장터)이었다

(제보자 상동)

 

 

5. 남성로(南城路)의 자연부락

 

 

□ 개관 남성로(南城路)는 '남문밖ㆍ남문의리ㆍ남성밖ㆍ남문의ㆍ남의리남성동 등으로 불려졌다대구읍성(邑城)의 남쪽에 위치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남성로(南城路)는 대구시 서상면이 있던 지역으로서 1911년 일제 강점기에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동산동ㆍ서내동ㆍ남중동ㆍ남하동의 각 일부를 합하여 남성정(南城町)이라 하다가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1945년 해방이 되자, 1946년에 정()을 로()로 고쳤는데 이때 일본식 동명인 남성정(南城町)을 남성로(南城路)로 변경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남문밖ㆍ남문의리ㆍ남성밖ㆍ남문의ㆍ남의리남성동 등은 남성로(南城路)의 별칭으로 항간에서 불리어졌던 것이며이들도 모두가 대구읍성(邑城)의 남쪽에 위치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남성로(南城路)의 별칭이다.

남성로(南城路)의 연혁(沿革)을 살펴보면남성동은 1650년경부터 대구의 명물인 약령시와 더불어 행정구역상으로 8. 15광복 이전까지는 대구부였으며 1981년 7월 1일 직할시 승격으로 남성동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남성동은 대구의 중심 교통로인 서성로대서로달성로 등의 간선도로를 끼고 한의원,한약방음식점포목점 등이 늘어서있으며 염매시장과 동아쇼핑으로 연결된 상가를 형성하여 대구시 경제발전의 모체가 되고 있다.

주요 사적지로는 제일교회제이교회동로교회계산천주교회구암서원송현사[서침선생 봉안]등이 있고대구 매일신문사와 현 대구 종로국민학교의 전신인 회도의 옛 터전이기도 하고 최초의 여류 비행사 박경원 여사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1915년을 전후하여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우리나라 국권 회복단독립군 등의 독립지도자들이 비밀리에 약령시를 중심으로 한 남성로 일대를 본거지로 활약하여 3. 1독립운동까지 그 운동을 전개하였다23) .

 

(1) 교당

 

교당은 순교지로서 남성동의 자연부락이다교당은 원래 시장터로 천주교인들의 순교지로 알려진 곳인데 주위에 인가가 들어서면서 남성동의 자연부락이 되었다현재는 적십자병원이 들어서 있다이곳은 시장터였는데 그 뒤에 천주교인들이 순결한 자리로 교당이 되었다고 한다.

 

(제보자 수성구 지산동 영남맨션 107동 502서수생경북대명예교수문학박사, 88수성구 지산동 우방맨션 103동 1103성병희, 84안동대 명예교수채록일자2008.7.16/수성구 범어2동 152-5, 정원용박약회 전 회장청주정씨 대종회 회장, 84/ 북구 동변동 선수촌 아파트 102동 208이용식, 70광신한약방 대표약령시보존위원회 이사장남구 봉덕2동 효성타운 208동 907채록일자 2008.6.6.)

 

(2) 기생촌

 

기생촌은 기생이 많이 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남성동의 자연부락으로도 통한다.기생학교인 권번을 졸업하고 정식으로 기생이 된 처녀들은 대개 “샘밖골목”[지금의 만경관 남쪽]에 모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을 기생동네 혹은 달성권번이라 했다지금의 만경관 남쪽을 두고 샘밖골목이라고도 하였으며이 동네에는 수백 년 묵은 회나무가 한 그루 있어[지금 상서동 성주여관 입구이 나무에 사랑에 실패한 기생이 목을 매어 죽은 이 후로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도 있었다당시 대구에는 수희라는 명기(名妓)가 있어 그는 노래와 춤서화 등 모든 것이 능통하여 한량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었다고 한다.

(제보자 상동)

 

(3) 남문

 

남문은 대구 4대문 중의 하나이며 남성동의 자연부락이다대구 남문은 대구 4대문 중의 하나로 남성동의 자연부락으로도 불리어지고 있다매국노이자 일본 앞잡이 박중양에 의해 1906년 11월에 철거하기 시작하여 1907년 4월에 걸쳐 철거된 남문이 건재하기까지는 남문 근교의 부락을 지칭한 말로서 자연부락명이기도 하였으나 남문이 철거된 이후부터 그 이름마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현 위치는 대남한약국 일대의 주변지역이다종로와 약정골목이 교차하는 네거리 자리에 남문이 있었다대구남문은 현재 망우공원에 복원해 있으나 옛날의 그 자리는 아니다.

(제보자 상동)

 

(4) 남문밖 ․ 남문의리ㆍ남성밖ㆍ남문의ㆍ남의리

 

 

남문밖은 남성동 밖에 있는 부락으로 남성동의 자연부락이다남문밖은 남성로(南城路)의 별칭이면서 자연부락 명칭이다남문밖은 남문의리ㆍ남성밖ㆍ남문의ㆍ남의리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이들 명칭은 남성로(南城路)의 별칭으로 항간에서 불리어졌던 것인데이들도 모두가 대구읍성(邑城)24) 의 남쪽에 위치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남성로(南城路)의 별칭으로 남아 있다.

(제보자 상동)

 

(5) 남성정(南城町)

 

남성정(南城町)은 남성동(南城洞)의 일제강점기 시대의 일본식 동명이다대구시 서상면이 있던 지역으로서 1911년 일제 강점기에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동산동ㆍ서내동ㆍ남중동ㆍ남하동의 각 일부를 합하여 남성정(南城町)이라 하다가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1945년 해방이 된 이후인 1946년에 정()을 동()으로 고쳤다.

(제보자 상동)

 

(6) 내명안

 

내명안은 남성동에 있던 객사이면서 자연부락으로 통한다내명안은 남성동에 있던 객사로 과거를 보기 위하여 상경하다 숙박하던 여관으로 주위에 마을이 생기자 남성동의 자연부락이 되었다현재 만경관에서 조금 지나 오른쪽에 있던 것으로 과거를 보기 위하여 상경하다가 날이 저물면 숙박하던 곳이다건물은 최근까지 있었다가 내명안이 헐린 지는60여 년이 된다이 건물 주위에는 일본인의 건물이 많이 있었던 곳이다.

(제보자 상동)

 

(7) 모군청

 

모군청은 남성동의 상여집이면서 남성동의 자연부락 이름으로도 통한다모군청은 인부와 상여를 대여해 주는 집이면서 주위에 부락이 들어서면서 남성동의 자연부락이 되었다.현재 매일신문 동편 곧 옛 효성초등학교 골목 부근에 모군청이 있어 이 이름에서 따온 자연부락 명칭이다이는 상여와 인부를 준비해 놓았다가 죽은 사람이 있어 장사(葬事치를 사람의 신청을 받아 전문적으로 인부와 상여를 대여하였다.

(제보자 상동)

 

 

(8) 뽕나무골목

 

뽕나무골목은 뽕나무가 많았던 골목으로 남성동의 자연부락이 되었다뽕나무골목은 현재 남성동과 계산동 그리고 염매시장 부근의 자연부락이다뽕나무골이라 부르기도 했다.현재 중구 동산동에서 계산동 남쪽을 거쳐 남성동 염매시장으로 연결되는 골목을 뽕나무골목이라 불렀다옛날 이 골목을 중심으로 부근 일대는 뽕나무가 많았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이곳에 뽕나무를 심은 이는 임란 때 명장 이여송을 따라 우리나라에 왔다가 난이 끝난 후 귀화한 두사충 장군인데 두사충은 귀화 후 이 일대의 땅을 하사 받고 거기다 뽕나무를 심어 길쌈을 장려했다고 전한다.

(제보자 상동)

 

(9) 약령시장

 

약령시장은 남성동의 한약을 팔고 사던 시장이면서 자연부락이다약령시장 주위에 부락이 생기자 남성동의 자연부락이 되었다현재 중구 남성로에 위치한 전국적 규모의 한약집성지로 조선조 1658년 효종 9년에 개장하였다일본중국러시아 등 아시아 나라의 한약물류 유통의 거점으로 전통한약 시장이다한약방한의원약업사인삼사 등 350여개의 한약관련 업소들이 들어서 있다경상도 관찰사가 조정에 진상할 약재를 모으기 위하여 약령시를 열었다는 설과일본이 1630년경 대마도주를 시켜서 약재를 요청하자 그 수요를 위해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제보자 상동)

 

(10) 오동나무골목 · 오동나무골 

 

 

오동나무골목은 오동나무가 많이 있었던 남성동의 골목이면서 자연부락으로 통용된다.‘오동나무골목’을 ‘오동나무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현재 고려예식장에서 천일한약방을 거쳐 구 제일교회 왼편을 지나 대활한의원으로 가는 이 길을 오동나무 골목이라 불리었다.특히 샘밭골에서 남성로까지 오동나무가 장관을 이루었다고 전한다옛날 이곳에는 대구 갑부였던 정해봉씨의 집이 있었다이 골목에 큰 오동나무가 있어 ‘오동나무골목’ 혹은 ‘오동나무골’이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제보자 상동)

 

(11) 실가게골목

 

실가게골목은 남성동에서 실가게가 많이 있었던 골목으로 자연부락명으로도 통용되고 있다실가게 골목은 실을 주로 팔던 골목이면서 주위에 인가가 들어서면서 남성동의 자연부락이 되었다현재 염매시장에서 약정골목입구 일대이다옛날에 대성양말 공장이 있어 주위에 실가게가 많은 데서 붙여진 명칭이다일제강점시대 화장품 가게에서 잡화상 형태로 판매하게 된 것이 효시가 되었으며 해방 이후 대구에 방직공장이 생기면서 규모가 커지게 되었고 전문적인 실 판매는 1965년 이후이다현재와 같은 전문상가가 형성된 것은1975년 이후이며 당시는 30여개 점포가 영업 중이었다.

(제보자 상동)

 

(12) 회나무골목

 

회나무골목은 남성동에 회나무가 있었던 골목이어서 이에서 연유된 골목이면서 자연부락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그래서 회나무골목은 골목이름이면서 남성로의 자연부락으로도 불려진다이 골목은 금호호텔 건너편에서 현재 희도 아파트 서쪽 담까지이다이 골목에 있는 큰 회화나무에는 실연당한 기생이 나무 가지에 목을 매어 죽는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제보자 상동)

 

(13) 희도학교

 

 

  희도학교는 남성동에 있었던 초등학교 이름이면서 자연부락으로도 통용되고 있다희도 학교는 원래 초등학교였으나 지금은 희도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남성동의 자연부락으로도 불리어지고 있다한말까지 한국인의 초등교육 기관은 서당이었다그러나 시대의 변천과 함께 신학문에의 향학열은 현대적인 학교를 설립하게 하였다청일 전쟁을 계기로 차츰 꽃피기 시작한 이 땅의 근대문화는 학교와 사설강습소를 낳게 하였고 서당은 차츰 과거의 유물로 되어가고 있었다그러한 정세 속에 달성학교를 1899년에 설립하게 되자 이에 자극을 받아 1900년에 매일신문사 자리에 희도 학교(대구 희도 심상소학교)가 문을 열게 되었다이 학교 근처의 마을을 희도 학교마을이라 부르기도 한다이 학교 출신으로서 대통령 전두환이 있다.

(제보자 상동)

 

※ 참고. <경상감영 지명 유래>

 

경상감영공원은 현 포정동 2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상감영이 들어오기 전에는 명나라에서 정유재란 때에 조선의 원군으로 참전하였다가 귀화한 명나라 장수 두사충의 집터였다두사충은 경산감영공원이 안동에서 이곳으로 옮긴다는 소식을 듣고 이 자리를 내어주고 계산동으로 옮겨갔다경상감영이 경북도청이 되었다가 도청이 산격동 현 경북도청으로 옮겼다경북도청이 산격동으로 옮겨간 후에 이 자리에 공원을 조성하였으니 경상감영공원이라 명명하였다이곳은 조선 선조 34(1601) 경상감영이 있던 장소로서 대구도심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1910년부터 1965년까지 경상북도 청사로 사용하였다가 청사가 다른 장소로 이전되고 난 후 대구시에서 1970년 '중앙공원'으로 명명하였다이후 1997년 도시미관을 해치는 담장을 허물고 공원전체를 재조성함과 아울러 대구의 역사와 관련된 문화유산을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이를 널리 알리고 보존하기 위해 '경상감영공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25) .

 

※ 참고. <대구읍성과 지명유래>

 

대구읍성은 1736년 영조 12년 경상감사 민응수에 의하여 축조 되었고 1870년 부사 김세호에 의하여 중수되었으며 1906년  경상관찰사 직무대리겸 대구부사 박중양에 의하여 철거되었다정확한 위치는 다음과 같다.

 

 

□ 대구 4대문과 지명

 ◦ 동쪽-진동문(鎭東門) : 동성로 제일은행 대구지점 (지금 유일하게 표지석을 세워                              놓았음)

 ◦ 서쪽-달서문(達西門) : 구 조흥은행 서성로 지점네거리

 ◦ 남쪽-영관() : 약전골목 대남한약국 네거리 동아쇼핑 뒤-영남제일관 1980년                              망우공원에 복원하여 놓았음.

 ◦ 북쪽-공북문(拱北門) : 북성로 벽산 대구지점(옛 조일탕)네거리

 

□ 대구 4소문과 지명

 ◦ 동쪽-정해루(定海褸) : 대우빌딩 앞

 ◦ 서쪽-주승루(籌勝樓) : 약전골목 합천약제사 앞

 ◦ 남쪽-선은루(宣恩樓) : 중앙파출소 앞

 ◦ 북쪽-만경루(望景樓) : 대구은행 북성로지점 앞(표지석을 세워두었음)26)

 

※ 참고. <대구읍성 ․ 뱍중양과 지명유래>

 

박중양은 대구읍성 철거에 대한 결재 보고서를 올리기 전 이미 철거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성벽철거로 인한 대구시민들의 동요를 염려한 박중양은 이와세나카에이토사이토 등을 부산으로 보내한국과 일본인 인부 60명을 대구로 데려와 한밤중을 이용성벽 수십 곳을 허물었다보고서를 받은 조정에서는 박중양의 의견이 타당성이 없다고 판단박중양의 죄를 물어 해임하려 했으나 이토히로부미의 로비로 무마된다하지만 그 때는 이미 철거작업이 반 이상 진척되어 있었던 관계로 중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박중양은 철거를 멈추지 않았고 1907년 4월 대구 시민을 동원하여 동남쪽 성벽도 철거를 완료했다대한매일신보에 1906년 11월 12일자 신문에 읍성을 허물고 나온 성돌 하나에 엽전 한 냥씩을 받고 일본인들에게 팔았다는 기사가 나온다.27)

 

□ 대구읍성과 철거연혁

 

 1903년 고종 40년 경부선 공사로 일본인과 한국인의 부동산 투기 성행

 1904년 고종 41년 4월 이용익 관찰사 일인에게 토지가옥매도 금지령

                             9월 대구일인거류민회 설립

 1905년 고종 42년 일본인의 대구시가지측량 / 6월 경부선 대구공사인부 약 1000

 1906년 고종 43년 2월 식민지통치기구 통감부 설치

                             7월 박중양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관찰사 서리로 취임

                             9월 일본인 대구이사청개관식

                            10월 박중양 성벽철거를 강행 중앙정부에 철거허가를 요청

            11월 성벽철거 불허훈시 및 박중양 해임 통지 이등박문의 로비로                              무산 일본대구거류민회 도로위원회 결성하여 성곽과 4대문을                              철거하기로 함

 1907년 순조 1년 2월 일본대구거류민회에서 성벽지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5,000엔을  투입

                          4월 대구 전동민을 동원하여 성벽철거를 완료

                          6월 박중양 평안남도관찰사로 전출 / 8월 한국진위대 해산

 1908년 순조 2년 6월 30일 박중양 경상북도관찰사로 다시 취임

                           12월 박중양 관민간친회(懇親會)를 열다

 1909년 순조 3년 1월 7일 순조 남행 대구 도착 전 일부도로 개통 가을 십자로 개통

 1910년 순조 4년 5월 십자로 확장공사 시작 / 8월 일본의 한국강점

 1912년 : 5월 십자로 확장공사 준공28)  

 

※ 참고. <대구읍성 성돌 활용처와 지명>

 

 

대구읍성은 1907년 4월 대구부사 박중양에 의해 철거되었다성곽 자리는 낭자하기가 마치 전쟁터와 다를 바 없었다성지를 도로로 만든다는 것도 아직 요원한 일이었으며 그저 성을 허물었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산더미와 같은 성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차일피일 하는 동안 일인들에 의해 방천 하상 지대와 칠성동 늪 근처 등에 버려지게 되었다이때 선교사들은 관찰력을 발휘해 성돌을 옮겨다가 집을 짓게 된다대구읍성을 허물면서 나온 돌은 선교사 건물들의 기초 돌이 된다선교사 주택들과 신명학교계성학교동산병원 등 선교관계 건물들은 모두 이 성돌로 터전을 쌓았다신명학교의 건물 3(본관사택기숙사)를 짓기 위해 동원된 우차(牛車)의 수는 50량이나 되었고 인부는 줄잡아 100명 가량 되었다고 한다대구읍성의 성돌은 우차(牛車) 50량에 실려 동산으로 옮겨졌다그래서 1912년 기공하여 1913년 4월에 낙성한 신명학교 본관의 초석도 옛 대구성 성돌이었다.29)

 

6. 남일동(南一洞)의 자연부락

 

□ 개관 남일동(南一洞)의 지명유래는 대구부성 남쪽 안이 되므로 남성안남성내리라고 부르다가 일본 강점기 시대인 1911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남정(南町)이 되었다가 광복 후 다시 1946년 남성안의 첫 마을이라고 하여 남일동이 되었다.

 

원래는 대구부 동상면 지역이었으나 1911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전동·사일동·사이동 일부가 합쳐져 남정(南町)이 되었다. 8·15광복 뒤인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남정(南町)을 없애면서 남일동으로 바뀌었다. 1981년 대구직할시 중구 남일동을 거쳐 1995년 대구광역시 중구 남일동이 되었다. 1993년에는 일부가 포정동에 넘어갔다남일동은 법정동이고 행정동은 성내1동과 성내2동이다이곳에는 조선군 국군부대가 있었고 활 쏘는 부대를 관리하는 사청(射廳)이 있었다사관바깥마와 사관안마의 남쪽일부는 중구 남일동이 되었고 동쪽일부는 동성동이 되었다서쪽에 중앙로가 남북 방향으로 지나는데 경부선(북구경계)~대구역~명덕사거리(명덕로터리)에 이르는 구간으로 길이 2.09㎞이다. 1956년 개통되었으며 같은 방향으로 지하철 1호선이 지난다아카데미극장과 중앙씨네마타운 등이 있다30) .

 

(1) 남정(南町)

 

남정(南町)은 남일동의 일본식의 동명이다남정은 일제 강점기인 1911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전동사일동사이동 일부가 합쳐져 일본식 지명인 남정(南町)으로 불리어졌다이 후 8.15광복 뒤인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일본식 마을 이름인  남정(南町)을 없애면서 남일동으로 바뀌었다.

(제보자 수성구 지산동 우방맨션 103동 1103성병희안동대 명예교수민속학자, 84세 수성구 범어동최재원대구대 전 대학원장, 84세 수성구 범어2동 152-5, 정원용박약회 전 회장청주정씨 대종회 회장, 84북구 동변동 선수촌 아파트 102동 208이용식, 70광신한약방대표약령시보존위원회 이사장채록일자 2008.7.14)

 

(2) 남성안 ․ 남성내리

 

남성안은 남일동의 별칭이다남성안은 ‘남성내리’라고도 한다남성안의 제일이란 뜻으로 남일동이 남문안의 제일가는 동네라는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 동명이다   

(제보자 상동)

 

 

(3) 사관바깥마

 

사관바깥마는 남일동의 자연부락이다사관바깥마의 지명 유래는 대구부 동상서면의 지역으로서 활을 쏘는 조선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활을 쏘는 연습장인 사정(射庭)이 있었다또한 이들을 관리하는 사관(射館)이 있었으니 사관 밖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사관바깥마라고 한다.

(제보자 상동)

 

(4) 사관안마

 

사관안마는 남일동의 자연부락이다사관안마의 지명 유래는 대구부 동상서면의 지역으로서 활을 쏘는 연습을 하는 조선군대의 사정(射庭)이 있었고이를 관리하는 사관(射館)이 있었으니  사관(射館안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사관안마라고 하였다 

(제보자 상동)

 

(5) 진골목 ․ 긴골목 ․ 부자골목

 

 

진골목은 남일동의 골목 이름이면서 자연부락 명칭으로도 통한다진골목은 진 골목곧 긴 골목이란 데서 나온 유래된 것으로 남일동의 골목 주위의 마을을 지칭하던 자연부락 명칭으로도 불리어 진다진골목은 ‘긴골목’ 혹은 ‘부자골목’으로 부르기도 한다진골목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명칭으로 긴 골목이란 데서 붙여진 명칭이다현재 종로 홍백원 왼편 우측 뒷골목에서 중앙시네마 극장 뒷골목으로 하여 국일 따로국밥 왼편을 지나 경상감영까지 이어지는 긴 골목이다행정구역상으로는 종로2남일동 동일동전동으로 이어지나 여기서는 편의상 남일동에 넣어 다룬다‘긴골목’을 ‘진골목’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경상도 말씨로 김서방이 짐서방기름이 지름으로 발음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개음화현상에서 나온 것이다조선조의 일급 주택지로 흙돌담이 아직도 남아 있어 붉은 돌담과 아름들이 들어선 고목나무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는 나무대문은 당시의 화려했던 부자들의 전성기의 옛 모습을 떠올리기에 족하다당시 대구 최고 부자였던 서병국을 비롯해 서병기서병직서병오국채보상운동의 간부였던 서병규 등이 이 골목의 주인노릇을 했다달성서씨의 마지막 거주자인 서재균씨는 최근까지 살고 있었다달성서씨 이외에도 약전 골목에서 장사하여 부자가 된 김성달 저택, 94년에 작고한 1954년에 창업했다가 94년에 작고한 김복주사장로얄 호텔사장평화클러치 창업자인 김상영회장 집코오롱의 이원만회장 집 등 대구 부자들의 집성부락으로 전통한옥이 많다대구 최초의 2층 양옥집 정소아과대구 최대 갑부 서병국의 저택이었던 대구화교협회 등 1920년대 근대 건축물과 한말 일제 때의 건물양식 등 대구 축소판의 옛 모습을 볼 수 있다지금의 진골목은 1970년대부터 젊은이들의 거리인 동성로와 비교될 만한 유흥골목으로 전락되어 가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제보자 중구 대봉동 111-1 청운맨션 3동 408호 윤용진경북대 명예교수고고인류학자 ,78수성구 지산동 영남맨션 107동 502서수생경북대명예교수문학박사, 88세 /수성구 지산동 우방맨션 103동 1103성병희, 84안동대 명예교수채록일자2008.7.16./ 북구 동변동 선수촌 아파트 102동 208이용식, 70광신한약방 대 표약령시보존위원회 이사장채록일자 2008.7.14)

 

 

7. 달성동(達城洞)의 자연부락

 

□ 개관  동의 지명 유래는 유명한 토성인 달성이 있는 달성공원이 인접해 있다대구부 서상면의 지역으로 달성이 있어 달성리라 한 것31) 이다. 1911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달성정(達成町)이 되었다가 1846년 달성동(達城洞)이 되었다.

삼국사기 권2에 ‘첨해 이사금 15(A.D.261) 2월에 달벌성(達伐城혹은 달불성(達弗城)을 쌓고 나마극종을 성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어 나말선초에 달성(達城)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동국여지승람에는 대구부의 서쪽4리에 석축으로 주위가 944자이고 안에는3개의 우물과 2개의 못이 있으며 군창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달성은 이 지역 토착 세력인 달성 서씨 세거지였으나 세종 때 외침에 대비하여 옛 남산역(옛 남산병원 터)부근의 땅과 교환하기로 하여 이때부터 38,775평이 국가소유가 되었다고 전한다.

 

원래는 대구부 동상면 지역이었으나 1911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5구역으로 나뉘어 성정(인교동), 횡정(서야동), 팔중항정(도원동), 팔운정(수창동)이 되었고 나머지 지역이 달성정(達城町)이 되었다. 8·15광복 뒤인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달성정(達城町)을 없애면서 달성동으로 바뀌었으며, 1975년 10월 일부를 서구에 넘기고 1981년 대구직할시 중구 달성동을 거쳐 1995년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이 되었다. 1993년과 1995년에는 일부가 수창동 · 태평로 3가동 · 인교동이 서구에 각각 넘어갔다달성동은 법정동이고 행정동은 성내3동이다.

새마야릇대굴웃대굴인동촌 등의 자연마을과 조산(造山)이 있다조산은 달성동의 정기를 보충하기 위하여 인공적으로 만든 산이다.

달성로와 원대로가 지나며달성로는 달성사거리~계명사거리 구간의 2.33원대로는 달성사거리~오봉오거리 구간의 너비 35m, 길이 2.5㎞이다. 1967년에 조성된 달성공원이 있으며 유적으로는 당천루(堂泉樓), 대선사 수운 최재우상매가 우소장공덕비석주 이상룡기념비왕산 허위선생기념비충혼각 등이 전한다문화재로는 관풍루(대구문화재자료3), 대구 달성(사적 62)이 있다충혼각은 1960년에 건립되었다32)

 

(1) 달성(達城)

 

 

달성은 달성동의 원래의 마을로 자연부락 이름으로도 통한다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에 있는 삼국시대의 토축성곽으로 달성동에 있는 공원이면서 달성동의 자연부락이다사적 제62둘레는 약 1,300m, 높이 4~7m. 성의 형상은 경주 월성(月城)과 비슷하며 금호강과 신천(新川)이 감싸면서 흐르는 평지의 낮은 구릉을 이용해 토루(土壘)를 쌓았다이 성은 삼한시대 이래로 이 지방의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던 집단들이 자신들의 생활 근거지에 축조한 자연발생적인 성곽이다성벽 아랫부분에 대한 조사에서 초기 철기시대의 조개더미와 각종 유물이 발견되었다그중에서도 특히 삼국시대 토기들이 출토됨으로써 초기 국가가 형성되는 단계에서 축조되었음을 알게 되었다『삼국사기』에 따르면 261[신라 첨해이사금 15]에 달벌성(達伐城)을 쌓고 나마(), 극종(克宗)을 성주로 삼았다고 했는데 이것이 곧 달성의 축조기록이라 여겨지며 이 성곽은 후대에도 계속 수축되었다조선시대에 편찬된 각종 지리지에 따르면 돌로 쌓아 둘레 944높이 4자에 이르고 성 안에는 우물과 연못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그런데 1968년의 조사 결과 성벽은 흙으로 쌓았으나 상층부에 석괴들이 노출된 것으로 보아 토석(土石)으로 쌓은 것 같다성에서 남서쪽으로 계속되는 내당동(內唐洞일대의 구릉지대에는 많은 돌방무덤이 있어일부를 발굴한 결과 금동관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으나 지금은 시가지 확장으로 모두 파괴되어 없어졌다현재 달성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제보자 중구 대봉동 111-1 청운맨션 3동 408호 윤용진경북대 명예교수고고인류학자 ,78수성구 지산동 영남맨션 107동 502서수생경북대명예교수문학박사, 88세 /수성구 지산동 우방맨션 103동 1103성병희, 84안동대 명예교수채록일자2008.7.16./ 북구 동변동 선수촌 아파트 102동 208이용식, 70광신한약방 대 표약령시보존위원회 이사장채록일자 2008.7.14)

 

(2) 새마

 

새마는 달성동의 자연부락이다대구부 동상면 지역이었으나 1911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5구역으로 나뉘어 성정(인교동), 횡정(서야동), 팔중항정(도원동), 팔운정(수창동)이 되었고 나머지 지역이 달성정(達城町)이 되었다달성동 본 부락에서 새로 생긴 작은 마을이란 뜻에서 생긴 명칭이다.

(제보자 상동)

 

(2) 야릇대굴 · 아릇대굴 

 

야릇대국은 달성동의 자연부락이다야릇대굴을 ‘아릇대굴’이라고도 한다원래는 대구부 동상면 지역이었으나 1911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5구역으로 나뉘어 성정(인교동), 횡정(서야동), 팔중항정(도원동), 팔운정(수창동)이 되었고 나머지 지역이 달성정(達城町)이 되었다. 8·15광복 뒤인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자를 없애면서 달성동으로 바뀌었다. 1975년 10월 일부를 서구에 넘기고 1981년 대구직할시 중구 달성동을 거쳐1995년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이 되었다 

(제보자 상동)

 

(3) 웃대굴

 

웃대굴은 달성동의 자연부락이다달성동의 아래쪽을 ‘야릇대굴’혹은 ‘아릇대굴’이고 위쪽 부락을 ‘웃대굴’이라 한다.

 

(제보자 상동)

 

(4) 달성정(達城町)

 

달성정(達城町)은 달성동의 일제시의 부락 이름이다달성정은 달성동(達城洞)의 일본식 동명이다대구부 동상면 지역이었으나 1911년 일제 강점기에 행정구역 통폐합 때 5구역으로 나뉘어 성정(인교동), 횡정(서야동), 팔중항정(도원동), 팔운정(수창동)이 되었고 나머지 지역이 달성정(達城町)이 되었다. 8·15광복 뒤인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달성정(達城町)을 달성동(達城洞)으로 변경했다.

(제보자 상동)

 

(5) 사관바깥마

 

사관바깥마는 사관 밖의 마을이란 뜻으로 남일동의 자연부락이었다사관이란 이곳에 조선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를 관리하는 관청이 있었고 이 사관 밖의 모든 부락을  사관 밖에 마을이 있었다고 이러한 말을 줄여서 ‘사관바깥마’라 불렀다고 한다.

(제보자 상동)

 

(6) 인동촌

 

인동촌은 달성동의 자연부락이다인동촌의 현 위치는 달성공원의 북쪽 자갈마당 서쪽 편의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이곳은 지리적으로 경북지역과 가깝고 인동 쪽 지역 사람들이 많이 옮겨와 살게 되면서 ‘인동촌’이라 불렀다고 한다.

(제보자 상동.)

 

(7) 조산(造山)

 

조산(造山)은 달성동의 산이면서 자연부락 명칭으로 통용되고 있다원래 조산(造山)은 달성동의 정기를 보충하기 위하여 인공적으로 만든 산으로 주위에 부락이 들어서자  조산(造山)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제보자 상동)

 

※ 참고. <달성공원과 잉어샘 전설>

 

달성공원자리에는 달성서씨의 집터이다항상 먹을 물이 적은 것이 흠이었다달성 안 이곳저곳을 퍼보았으나 물이 나오지 않았다이처럼 곤란을 당하던 중 어느 집 주인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는 “나는 이 성을 지키는 사람인데 성 안의 어떤 곳을 파면 가족들이 먹을 물이 충분히 나올 것이다”라고 일러주었다이튿날 날이 훤하게 밝자 동네 사람들을 모아 지난밤 꿈에 노인이 알려준 곳을 파보았더니 이가 시리도록 찬물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이렇게 발견한 샘은 물이 차가울 뿐만 아니라 물맛까지도 매우 좋아 사람들은 하늘의 신령이 가르쳐줘서 찾은 샘이라 하여 영천()이라고 불렀다.

서씨 일가족은 이 샘물로 하여금 아무 불편 없이 살았다한참 뒤에 조정에서는 높은 벼슬아치를 달성공원에 들였는데 주위사람들이 영천의 신기한 내력을 얘기하니 벼슬아치가 그 물맛을 보고 싶으니 한바가지 퍼오도록 부탁을 했다사람들이 달려가서 커다란 두레박으로 물을 길러 올리는데 신기하게도 두레박속에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담겨 올라왔다.버릴까 생각했으나 이상한 생각이 들어 벼슬아치에게 그대로 가져가 전후 사정을 얘기하니 그 잉어로 음식을 만들게 하고 맛을 보더니 과연 다른 곳에서 맛 볼 수 없는 신기한 맛이라고 하면서 칭찬을 했다그 벼슬아치는 그 음식을 먹고 떠났는데 그로부터 달성공원에 귀한 손님이 올 때마다 그 수요만큼 잉어가 두레박에 담겨 나왔으니 이 샘을 잉어샘이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세월이 흐르는 동안 잉어샘은 사라지고 그 자리가 어디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33) .

 

※ 참고. <달성공원과  미꾸라지샘 전설>

 

 

달성공원 입구에서 북쪽으로 현재 복개공사를 하여 도로로 바뀐 자리에 있었다는 미꾸라지 샘에는 효성이 지극한 달성 서씨 일가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다달성서씨의 어느 집에는 외아들이 앞을 보지 못하는 부친을 모시고 살았다이 외아들은 부친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약을 다 쓰며 지극한 정성으로 병환을 간호했다그러던 어느 날 집으로 찾아온 스님께 애타는 심정을 이야기 하니 스님은 미꾸라지를 잡아서 꼬아 드리면 나을 것이라 말해주었다그 말을 들은 외아들은  엄동설한인지라 미꾸라지를 구할 길이 없었다.

하루는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오다가 정신없이 쓰러지고 말았다그런데 비몽사몽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주위를 살펴보아라.”라고 말해주었다꿈결에서 깨어난 외아들은 사방을 둘러보니 없었던 웅덩이에 몇 마리의 미꾸라지가 놀고 있었다얼마나 반가운지 그 웅덩이를 보고 수십 번 절을 한 후에 미꾸라지를 잡기 시작했다처음에는 몇 마리밖에 보이지 않던 미꾸라지가 계속 불어나 솟아오르는 샘물처럼 나왔다이 미꾸라지를 정성껏 꼬아 아버지께 드렸더니 병이 삽시간에 사라졌다그 후 그곳에 다시 가보니 미꾸라지는 없고 샘만 남아  있어 그로부터 이 샘을 미꾸라지 샘이라 부르게 되었다.34)  

 

※ 참고. <달성공원과  청어샘 전설>

 

달성공원 앞을 흘러 금호강으로 들어가던 달서천은 옛날에는 한없이 맑아 이 일대 주민들이 이곳에서 빨래는 물론 채소도 여기서 씻어 먹었다물이 맑다보니 민물고기는 물론 바다고기까지 산란기가 되면 알을 낳으러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가 금호강을 거쳐 이곳까지 왔다고 한다.

그렇게 물이 맑은 그 때 이곳에 청어샘이라는 우물이 달서천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일제강점기 때 시립풀장이 있던 곳이다이 샘이 청어샘이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일이 있고서 부터이다.

 

이 마을에 마음씨 곱고 인정이 있는 과부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가난하지만 마음씨 착하고 이웃에 어려운 일이 닥치면 제일 먼저 달려가 일을 거들어 주는 이 과부를 동리 사람들은 입을 모아 칭찬했다이 과부의 집에 하루는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모처럼 귀한 손님이 왔지만 집안 형편이 가난하니 맛있는 반찬을 구할 수는 없고 따뜻한 밥이라도 정성껏 지어 대접하자는 생각을 하며 샘으로 물을 길으러 갔다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는데 다른 때보다 두레박이 한결 묵직하다웬일인가 해서 바삐 끌어 올려보니 이게 무슨 조화인지 두레박 속에는 큰 청어 한 마리가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게 아닌가.

과부는 그 청어로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 귀한 손님을 대접할 수 있었다그 다음에도 기적은 되풀이 되었다그 일이 있던 뒤부터 이 마을 어떤 집에 손님이 와도 그 주인이 이 샘에 물을 길으러만 가면 두레박 속에는 손님의 수효대로 청어가 담겨 올라오는 것이었다.즉 손님이 한 사람 온 집에는 한 마리가두 사람 온 집에는 두 마리가 잡혀 올라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뒤부터 이 샘을 청어샘이라 불렀는데 샘에서 청어가 나오는 것은 이 샘물 길이 땅속에서 동해바다와 연결되어 있는데 동해 용왕이 대구 사람의 후덕한 마음씨를 기쁘게 여겨 청어를 보내준 것이라고 믿었다고 전해온다.35)

 

※ 참고. <달성공원 지명유래 전설>

 

옛날에는 달성공원이 큰 들과 논밭으로 이루어졌었고 지금의 달서천 앞으로는 소나무 숲과 시내가 있었다이 시내는 부인들의 빨래터로 이용되었는데 하루는 한 노파가 달밤에 아이를 업고 빨래를 하다가 달빛아래 산이 움직여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였다노파가 이것을 아이에게 이야기하자아이는 거짓이라고 하였다아이의 말이 끝나자 산은 그만 그 자리에 멈춰서 지금의 달성공원이 되었다고 한다.36)

 

 

8. 대봉동(大鳳洞)의 자연부락

 

 

□ 개관 대봉동(大鳳洞)은 1911년 지방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달성군 수성면의 봉덕동과 대명동이 대구부에 편입되는 동시에 두 동의 일부를 합하여 대명과 봉덕의 앞 글자를 따서 대봉정(大鳳町)으로 부르게 된 것에서 유래되었다. 1918년 달성군 수성면의 대명동과 봉덕동이 대구부에 편입되면서 그 일부를 병합하여 대봉정(大鳳町)이라고 하였다. 8.15.광복 후인 1946년 대봉동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1949년 대구시에 편입되었다. 1951년 남부출장소가 설치되고, 1963년 남부출장소가 남구로 승격되면서 대구시 남구에 편입되었다. 1980년 남구 대봉동 일부로 이천동을 신설하고대봉1동과 대봉2동은 중구에 편입되었다. 1981년 대구시가 대구직할시로 승격되고, 1995년 대구직할시가 대구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대구광역시 중구에 편입되었다.

법정동인 대봉동은 행정동인 대봉1·2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건들바우 박물관이 대봉2동에 있으며그곳에는 진주 하씨 묘 출토유물이 보관되어 있다신천 강변에는 초대형 백화점인 대백프라자가 있다.

문화재로는 진주 하씨 묘 출토유물(중요민속자료 229), 이공제비 및 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公堤碑-郡守候範善永世최근에 상동교 북쪽 ‘이공제공원’으로 옮겼음), 건들바위(대구기념물 2) 등이 있다37) .

 

(1) 이공제비(公隄碑)

 

이공제비(公隄碑)는 비석(碑石)이면서 그 주변 부락을 일컫는 대봉1동의 자연부락 명칭으로 통한다현재는 수성교 남쪽편에서 대백프라자 사이의  대봉1동 지상에 있었다이공제비(公隄碑)는 이 자리에서 수성구 상동교 동편에 있는 이공제공원으로 옮겨 갔지만,지금도 이공제비(公隄碑)가 있었던 대봉1동 그 자리의 부락을 이공제비(公隄碑마을이라 부르기도 한다.

(제보자 북구 동변동 선수촌 아파트 102동 208이용식, 70광신한약방 대표약령시보존위원회 이사장채록일자 2008.7.14/ 대봉1동 사무소 박순호채록일자 1999.5.5.)38)

 

※ 참고. <이공제비(公隄碑)와 지명유래>

 

 

정조 1(1776) 이서()가 대구판관(大邱判官)으로 부임하여 주민들의 침수피해를 염려한 나머지 하천 제방공사를 위해 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자 1778년에 정조 2년 사재를 털어 현재의 신천으로 수로를 돌렸다그 후로부터 대구 시가지가 수해로부터 벗어나서 가구를 제자리에 놓고 살게 되었다이에 감동한 주민들이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중국 송나라 소식이 항주자사로 있을 때 축조한 제방을 소공제(蘇公隄)라 명명한 것을 본 따 이공제(公隄)라 칭하고 1797년 이공제비(公隄碑)를 세우고 매년 음력 1월 4일 향사를 올렸다.

이 비는 원래 수성교 서쪽 제방에 있었으나 그 후 여러 차례 이전하였으며 1986년 신천대로 확장 공사 때에 방천시장 동편으로 이전하였다. 1986년 신천대로 확장 공사 시에 수성교 서편 지하 깊은 땅에서 또 다른 이공제비가 발견되었다이 비는 1797년에 세운 원래의 이공제비임이 밝혀졌다이 비가 병인년 대홍수로 떠내려 간 것을 신천대로 공사 중 지하 10m 지점에서 발견된 것이다지금까지 전해온 비석은 수해로 떠내려간 비석 대신 그의 업적을 영구히 기리고자 1808년에 다시 비를 세운 것이다그래서 지금은 이 두 개의 이공제비와 나란히 보존되고 있다그 비석 옆에 같이 세워져 있는 “군수 이후범선 영세불망비(君守侯範善永世不忘碑)”는 1989년에 세운 것으로 1880년 큰 홍수가 있어 이공제의 하류 부분이 크게 부서져 대구읍성이 위험하게 되자 이공제의 보수를 위해 주민 부담 없이 국고로 수천 금의 비용을 들여 단시일 내에 공사를 완료하였다주민들은 그의 공적에 보답하고자 이공제비와 나란히 비를 세우고 이서공과 함께 향사하였다그러다가 2000년 초에 이 비를 다시 상동교 동편 이공제공원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보자 상동)39)

 

이공제비는 대구판관 이서()가 신천의 물줄기를 돌리기 위해 제방을 쌓은 공적 을 기리기 위해 대구주민들이 세운 송덕비이다.

1778년 이전의 신천은 물줄기가 지금 과는 달리 용두산→수도산 기슭→반월당→신명여고 앞→달성공원 앞을 지나 달서천으로 흘러 금호강과 합류했다대구의 중심부를 흐르던 이 강은 홍수 때 시가지로 넘쳐 침수되는 등 피해가 극심하였다.

그러나 1776(정조 원년선생이 대구 판관으로 부임한 후 주민들의 침수 피해를 염려해 1778년 사재를 털어 대규모 치수사업을 시행하여 현재의 신천으로 물길을 돌리고 부터는 대구 시가지가 홍수의 피해를 입지 않게 되었다이에 감동한 주민들은 이판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중국 송나라 소식(蘇軾)이 항주자사로 있을 때 축조한 제방을 소공제라 명명한 것을 본 따 이공제라 청하고 1797년 이공제비를 세우고 매년 음력 1월 14일에 향사를 올렸다40) .

 

※ 참고. <이서(漵 1732~1794)와 이서공원>

 

대구판관으로 있었던 이서공은 1778년에 개인의 재산을 털어서 용두산-수도산-동산-달성공원 앞~금호강으로 흐르던 물줄기를 현재의 위치로 돌려 홍수의 피해를 막았다이에 감동한 백성들은 그의 공덕을 기려 이때 쌓은 제방을 '이공제'라 하고 '이공제비'를 세웠다.그 후 이공제비는 여러 번 자리를 옮겨오다 현재는 '이서공원'에 보존되어 있다이서공원은 대구시 문희갑 시장이 신천의 물줄기를 바꾼 이서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010월 신천 동로변 상동교와 중동교 사이에 조성된 공원이다.

(제보자 상동)

 

※ 참고. <신천(新川명칭유래>

 

세계적으로 봐도 대구만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쉽게 갈 수 있는 산과 강이 지척에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인구 250여만 명의 거대한 도시를 지탱해주는 대구의 원동력이 산과 강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최근 대구시나 경상북도는 물론 지역 정치권에서도 금호강과 신천을 생태적으로 건강하게 개발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려 하고 있다금호강은 경북과 대구를 통과하고 있어 두 광역 지방자치단체 간의 협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특히 대구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로서의 신천은 그 위상이나 생태기능으로서의 역할을 감안할 때 매우 중요하다대구의 중심 한가운데를 가르는 신천은 지역민들의 삶의 터전인 것이다.

이처럼 지역민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고 친숙한 신천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다신천의 어원이 정조 2(1778)에 대구 판관으로 부임해온 이서()라는 분이 대구 중심을 흐르던 신천의 잦은 범람으로부터 주민들의 인명과 재산을 보호할 목적으로 사재를 들여 현재의 물길로 돌린 이후 생겨난 새로운 물줄기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신천(新川)의 한자 의미에서 생각해 본다면 일견 그럴듯해 보인다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첫째이서가 신천의 물줄기를 변경시켰다는 1778년 이전에 제작된 팔도여지지도(16세기 후기), 광여도(1698~1703등에 표현된 신천 물줄기는 현재의 신천 물줄기와 동일하다.

둘째, 1778년 이전에 발간된 『경상도지리지』(1425), 『세종실록지리지』(1454), 『신증동국여지승람』(1531)의 <대구편>에 이미 신천이라는 지명이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셋째신천이라는 용어에 대한 문제이다관련 고문헌을 모두 참고해 봐도 대구 신천의 지명유래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그러나 신천이라는 용어가 대구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경기도 양주시의 신천이나 서울 강동구 잠실역 주변의 신천 등은 샛강의 의미를 가진다유추해 본다면 대구의 신천 역시 대구부와 대구부의 속현인 수성현 사이를 흐르는 하천이라는 뜻에서 ‘사이천’또는 ‘새천(샛강)’이 한자로 표기되는 과정에서 ‘신천’으로 오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천과 관련하여 대구시민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또 다른 지형으로 신천에 존재했었다고 기록으로 전해지는 입암[,삿갓바위]이다입암은 조선 초 대유학자인 서거정 선생이 대구(大丘)의 아름다운 풍광을 칠언절구 10수로 지어낸 ‘대구 십경’ 중 ‘입암조어[巖釣魚삿갓바위에서 낚시하는 풍경]’에 등장하는 지형으로 현재 봉산동에 위치한 건들바위로 인식되고 있으나 사실과는 다르다건들바위는 삿갓바위의 뜻을 가지는 입암()이 아니라 ‘서 있는 바위’라는 의미의 입암()이다지금의 건들바위가 있는 곳의 마을 이름 역시 조선시대에는 건들바위의 서 있는 모습을 따 입암리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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